그런데 노인들이 그저 짐스러운게 아니라 짐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세대 간에 상호지원과 책임이 여전히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어려움이 훨씬 덜하다. 이를테면 예전에는 매우 독립적이었지만 나이가 들어 연로하고 노쇠해진 나의 어머니는 이제 도움이 필요하다고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다.
어머니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도움이 필요해졌을 때 그들을 돌보았다. 어머니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므로 긴 논의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자립적이지 못한 생활을 좋아하지는 않았고 필요할 때는 자신의 결정권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러한 형태의 ‘세대 간 계약’은 지금과 같은 유동적인 시대에는 더 이상 유지되지도, 유지될 수도 없다. 그렇지만 확실한 사실은 대부분의 ‘자녀’가 이미 이는 나이에 노쇠하고 도움이 필요한 부모를 돌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부모님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자녀들의 임무이며,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님이 가능한 한 잘 지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누가 부모를 모실 수 있는 충분한 공간과 시간을 가졌는가? 또한 노인들의 반대도 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광범위한 돌봄이 아직 필요하지 않을 때는 이렇게 말 할 수 있지만, 두려워하던 날이 다가오면 소망이 바뀔수 있다.
의존도가 높아지면 예전에 있었던 가족 간의 특징들이 다시 나타나며, 이것은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노화한 부모의 의존도에 대해 화를 낼 수도 있고 이러한 문제들을 기회 삼아 다시 한번 잘 해결해 보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노년기에 인생의 마지막을 어디서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생각해 보고 가족 및 친구들과 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의존성의 문제는 문제의 한 측면이다.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은 자주성을 점점 잃는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싶지 않다는 문제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자기 결정권을 유지하는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가능한 한 많은 자주성을 갖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인 중 하나이다.
오랫동안 암으로 고통받던 한 여성이 어느 날 ”이제 충분해! “라고 말하며 더 이상 치료를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자주성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독립적으로 생활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런데 인간은 언젠가 더 이상 자립적으로 살 수 없게 된다. 의존성과 마찬가지로 자립성에도 여러 단계가 있기는 하지만, 자립성은 점점 줄어들고 죽음으로 끝나게 된다.